1.
허리가 아팠다. 이삼주 전부터 약을 한 주먹씩 먹고 있는데도 안 나아서. 이러고 자전거 대회를 간다는 게 말이 되나마나 마음이 오락가락하다가 금요일 일정이 비는 바람에 시간이 아깝네 기회가 아깝네 괜히 제풀에 혼자 떠밀려서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이 변할까봐 숙소부터 덜컥 예약. 잘했군. 만사는 불여튼튼이다. 동네 병원에 가서 약도 미리 더 받았다. 그래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으면 기권도 불사하리라는 마음을 먹고. 그런데 집을 나서는데 사실 발이 잘 안떨어지더라. 말 그대로 심신이 편하지를 않아서. 거기다가 추적추적 비까지 오고 말이야.
우선 딴생각 안나게 한달음에 태안반도까지 냅다 올라 가기로 했다. 첫번째 목적지는 가로림만. 경유지는 그 길목에 있는 아산 공세리 성당. 이야, 아시아 동쪽 끝에 콧구녕만한 나라라더니 한 걸음에 갈라니 한 참 가네. 그러게 우리나라가 그렇게 작은 나라가 아니라니까. 뭐, 걸어 다니면 좀 더 멀기는 하겠지만....
하지만 나한테 묻지 마라. 나는 잘 모른다. 외가가 한국 기독교 1세대라느니 어머니가 독실한 집사였느니 집구석 여포에 천하없는 졸갑증 팔랑귀 아버지는 유교도 잠시 괴상한 일본식 태양 숭배도 잠시 말년에는 기독교도 잠시... 친가 외가 중에는 세상 시끄럽던 얄궂은 사이비 기독교에 심취한 사람들도 있고 해서 그에 어울리는 기구하고 다양한 종교 체험을 하고 자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른다.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다. 한 때는 뭔가를 찾아 보려고 나름대로 책도 찾아 읽고 궁리도 많이 해봤지만 다만 세상을 창조했다는 그 신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 개신교가 주장하는 그런 형태의, 그런 개념의 절대자는 아닐 거라는 확신만 남았다. 너그들이 그렇게도 기필코 한사코 주장하는 그런 절대자가 정말 이 세상을 만들어 논거라면 그거 뭔가 단단히 잘못 된 거야. 아니면 그 양반 솜씨가 형편 없든지. 그러니 믿어라 말아라 으르딱딱거리지들 마. 그거 다 신성모독이야.
그러게 길을 떠날 때마다 일없이 오래된 성당들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그런 질문을 받을 수도 있지. 뭐, 딱이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다. 오래된 절집을 찾아 다닌지는 더 오래 되었으니 그냥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갑지. 나처럼 살짝 어리석은 사람들의 열심들이며 진심들이 모여있는 거 같은 그런 분위기. 그것도 오래된 건물들로만. 사람은 안 가려. 사람은 불신자건 신자건 불자건 집사건 보살이건 무당이건 점쟁이건 뭐건 간에 나한테 적대적이지만 않으면 돼. 밑바닥 잡놈만 아니라면. 그리고 서로 안녕하기로만 한다면.
2. 전주
숙소에서 잠을 좀 설치는 바람에 그냥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 타고 한옥마을 한바퀴.
3. 개심사
그리도 오랫동안 내 기억속에 남아있던 개심사. 언젠가는 꼭 다시 찾아가리라 생각 날 때마다 몇 번이고 뇌이던 곳이었는데 그 때 참 아무것도 없이 굽이굽이 산골짜기에 흙마당만 덩그러니 있던 절 입구에는 이제는 흔해빠진 절집들처럼 그냥 그저 그런 어지러운 식당이며 천막따위들. 시멘트로 말짱하게 바른 주차장 너머로 뻔뻔스럽게 닦여진 소방도로. 차를 타고 올라 갈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때 기억이라도 짚어보자 싶어서 걸어 올라갔더니 그 때는 없었던 단청도 찬란한 일주문 하며. 아침부터 굶었어서 요기라도 할까했더니 싼티 역력한 식당 안에는 대낮부터 시끌시끌 얼큰한 늙은이들. 그래 뭐 깜냥대로 한세상 살다 갈 일이지만 낫살이나 제법 들고서는 절집 앞에서 그러고 싶으냐. 주방안에서 설겆이 한다고 덜그덕거리는 주인을 찾았더니 '우리는 1인분 주문은 안받아요.' 그래 그래, 대낮에 질펀한 술자리 보고서는 진작에 짐작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냥 굶고 말지. 공짜로 밥 달라는 것도 아닌데 이제는 어지간만 하면 혼자 다니는 여행객은 밥 얻어먹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오래 전 기억보다 좀 더 넓어진 듯 좀 더 멀어진 듯한 돌계단을 한 참 올라가자니 진땀이 바짝 난다. 때 아니게 더운 날씨도 한 손 거들고. 그럭저럭 겨우 절 마당에 들어서니 그 호젓하던 산사는 어디 갔노. 널찍한 절마당에 승용차들이 여기저기. 어린 놈이 건너갔다 건너오던 외나무다리도 새로 만든 듯 그 때 외나무 다리가 아닌 듯 하고 그 아래 연못도 물이 흐려보이네. 그냥 마음을 가다듬기 어려울만큼 섭섭하고 울적해져서 절구경이랍시고 돌아다닐 엄두도 안나고. 아니 내가 너무 기대를 했어서 그런가.. 그럼 그냥 그 때 그 맛있었던 약수나 한 사발 들이키고 하산 하려니 약수터가 어디였더라 짐작도 안 가네.
마음이 부대끼고 어리둥절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꽃밭 정리하는 보살님에게 약수터 어딨냐고 물었더니 그 약수 막힌지가 언제인데 지금 와서 그 약수를 찾냐고 어디서 오셨길래 그리 오랜만에 오셨냔다. 오래 전에 어린 놈 손 잡고 와서 그 물 참 맛있게 마시고 갔었는데 물이 없어 많이 섭섭하다하니 그러게 이 좋은 절을 왜 인자사 늦게 왔냐고 그 보살님도 그 세월이 그냥 섭섭하단다. 그러게 그 많은 세월 다 보내고 나는 왜 이제서야 왔을까. 그냥 좀 헛헛해서 그 물 마실라고 밥도 물도 굶고 올라왔노라 실없는 소릴 던지니 약수는 못드려도 생수는 한 병 드릴 수 있다고 안에 있는 작은 보살님을 불러서 평창수 한 병 건네 주신다. 그러게 개심사에 와서 평창수를 드시것네요. 섭섭해서 우째요. 그래도 보살님 덕에 이렇게 맛있는 평창수도 마셔보네요. 고맙습니다. 보살님도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땀 닦고 인사하고 돌아서니 그냥 다 허전하고 섭섭하다. 배도 고프고 허리도 아프고 먼 길 돌아왔는데 절집은 옛 절집이 아니고 세월도 그 세월이 아니네. 오늘은 날이 아니었는갑다. 안 올 걸 그랬어. 그냥 다시 오고싶은 마음만 묻어 두고 살걸. 괜히 왔어.
4. 셋째날.
손꼽아두었던 데는 얼추 돌았으니 인자는 남는 게 시간이라 어디를 어떻게 들여다볼까 궁리를 하다가 그림이 근사하던 색장정미소를 일단 가 보기로. 누구는 좋더라 누구는 거길 왜 가냐 호불호가 갈리드만 게다가 느닷없이 나타나던 입구를 첫 걸음에 찾지 못해서 잠깐 헤메는 사이에 나타난 예쁜 길 이름. 이쪽 동네가 확실히 센스며 감성이며 은근 내 타입이야. 좋아요.
별 기대없이 왔다가 마침 아침 햇살 받은 풍경이 좋아서 한 참 머물렀던 색장정미소. 100년 된 건물이라는데 나름 원형을 잘 살려서 보존해놓은 현역 카페였다. 아직 오픈 전이라 차는 못마셨지만 주인 영감님의 배려로 혼자 아래 위층을 오르내리면서 구경을 하고 사진도 여럿 찍었다. 고물 감성 가득한 시대착오적인 카페다.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은 꼭 한 번 가볼 만한 명물. 호불호가 조금 들쭉날쭉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좋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적당한 시간에 차도 한 잔 하고 그러고 싶은 곳.
팔복 예술공장. 폐 공장을 밀어버리지 않고 살려 둔 것은 찬성. 하지만 굳이 채색하고 가공해서 예술스럽게 만들려고 한 것은 반대. 폐 건물이 음흉해지지 않도록만 최소한의 관리만 하면서 폐허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꽤 많았던 곳. 뭐,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주렁주렁 줄 서서 내 동선을 막아서던 시티투어 관광객들이 좀 거추장스럽기는 했지만.
5. 10월 27일 이번 여행의 메인 이벤트. 2024 장수 MTB XCM
이 때 까지는 그래도 좋았지. 살짝 들뜬 분위기에 날씨도 그만했고 들뜬 기분이라 그랬었나 허리도 좀 덜아픈 듯 어디 한 번 덤벼 볼만하다는 느낌에 으랏차차, 나는 이 날을 위해 살아왔던 것이었다!!!! 그랬었지. 그러고 한 30몇 km 쯤 까지는 그럭저럭 앞서거니 뒷서거니 재미있고 신나고 그랬는데, 무릉고개 고갯마루 쯤에서 갑자기 생전 처음 느껴본 허벅지 통증. 얼결에 손으로 짚은 허벅지는 쥐가 나서 꽈비기처럼 마구 뒤틀려있었다. 아무래도 한쪽허리를 안쓰려고 좀 삐딱하게 용을 써서 자세가 망가졌던 듯. 하도 아프길래 처음에는 허벅지 근육 어디쯤이 절단 된 줄 알았고만.
뭐 어쨌든 페달링이 불가능한 지경이니 일단 의료팀에 전화를 했는데 왜 전화를 안 받아. 아니 뭔 의료팀 번화번호를 써놓지를 말등가. 뭐 그래도 어찌어찌 다리를 질질 끌며 고개를 넘어서서 다시 달려보니 쥐났던 건 어지간히 풀리기는 했는데 어쩐지 그 느낌이 아직 꿈틀꿈틀 남아있어서 다시 또 그럴까 잔뜩 쫄아버린 쫄보. 하나 씩 둘 씩 나를 추월해가는 사람들 등짝만 보고있자니 망연자실 의기소침. 거의 꼴찌에서 몇 번째가 되다보니 컷 오프 시간 안에 들기는 글러버렸고 비까지 두들겨맞고 길 안내하던 군청 직원들한테 미안해서 그냥 차에 실려가기로. 내 뒤에 몇 명 남지 않았던 사람들도 다 같이 챙겨 담고 중간 지점쯤까지 차로 점프. 떡국 한 그릇 먹고는 잠깐 쉬다보니 또 혹시나 괜찮을지도 몰라 욕심이 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 여차하면 다시 뒤틀릴 것 같은 느낌이 스믈스믈 남아있어서 소심한 나를 다시 하나 둘씩 지나쳐 멀어져가는 등짝들... 결국 한 10여키로 달리다가 kom 구간 고갯마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트럭에 다시 타고 말았다. 그걸로 내 레이스는 끝. 최소한 컷오프는 면하자 했는데 미션 실패!. 괜찮아. 비겁하지는 않았잖아.........사실 81km 거리에 획득고도가 2000 넘는 구간이라 심리적으로도 압박이 없지 않아서 멀쩡히 달렸어도 시간 내에 완주 했을까? 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다. 뭐, 쥐나고 비 오고 그런 김에 핑게거리 생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