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혼자서 배낭 짊어지고 긴 시간 산길이나 들길을 터벅터벅 걷는 것을 좋아한다.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좋긴하지만 오르고 난 뒤의 지루한 걷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더라. 산에 올랐다고 만세 부르고 앉아 놀다가 내려가는 건 재미 없어. 산에 올랐으면 걸어야지. 가능하면 해가 지도록 하염없이 걷는 게 좋아. 숲길을 걷는 것도 좋고 관목대나 억새밭 사이로 난 길은 더 좋아. 딱히 무슨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전부터 나는 그런 길이 좋아. 신불산 넘어서 영축산 가는 능선길같은 산인듯 들판인듯 황무지같은 느낌.

걷다가 쉬다가 때로는 우두커니 먼 산 바라보면서 생각을 되작거리는 것도 좋고. 봄 가을 평일 산행이면 사람도 별로 없어서 막막할 정도로 조용한 능선에서 선듯한 바람을 맞고 있으면 이보다 더한 도락이 또 있을까 싶기도하다. 바위에 걸터앉아 드문 드문 지나가는 사람들 보면서 초코바나 양갱을 까 먹는 것도 맛있고 재미있고.

억새가 필 때쯤 되면 혼자 사자평에서 노닥거리다가 산에 기대어서 잠깐씩 졸기도 하고 어느 귀퉁이에서 얼핏 잠이 들었다가 어스럼 저녁 나절에 깨어나 앗차, 늦었구나 귀신 쫓아올라 허둥지둥  바쁜 하산길도 짜릿하지. 그런데 예전에는 멧돼지며 곰이며 들개같은 무서운 짐승들이 없었는데 요즘은 그런 짐승들이 좀 무섭긴 하더라.

지금은 젊었을 때처럼 몸을 생각대로 함부로 썼다가는 아주 못쓰게 될까 겁나서 욕심껏 오래 걷지는 못하지만 내 몸뚱이보다 더 뚱뚱한 박배낭을 짊어지고 몇 박이고 지리산을 혼자 헤메고 다니기도 하고 그러다가 밤길에 길을 잃어서 어디쯤인지 짐작도 못할 깊은 산골짜기에 고립된 채로 비박을 하고 다음날 아주 거러지 꼴이 돼서 겨우 하산 한 일도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아, 그때 어쩌면 잘못될 수도 있었구나 싶기도 한데 운이 좋았는지 객기 왕성한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그리 무섭지도 걱정되지도 않았었다. 그 때는 휴대폰도 없던 때고 산악 구조대나 119 구조대도 없었으니 혹시라도 일이 꼬일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다행히 친구 중에 프로 산악인이 있어서 평소에 얻어 들은 잡지식을 탈출 할 때 좀 써 먹긴 했는데 어쨌든 앞뒤 없이 나대고 다니다가 자칫했으면 험한 꼴 볼 뻔 했었다.

지금도 날씨가 그럴듯하면 하루 산행을 하고 싶어서 옷장 속에 있는 배낭이며 장비들을 뒤적거려보기도 하지만 사실 조금씩 자신감이 떨어져서 큰 배낭들을 이고지고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아 이제 큰 것들은 당근에다 팔아먹어야 하나 어쩌나 궁리를 하고 있다. 아직은 미련이 남아서 선뜻 그러지는 못하지만. 욕심은 한보따리인데 가진 몸이 점점 부실해지니 옳은 생각을 못하고 다른 데다 핑게를 갖다 씌울까 생각도 한다. 예를 들면 '저 신발 밑창이 다 닳을 때까지만 더 다닐까'  따위의 시한부 핑게.

2. 나는 자전거를 좋아한다.  한 때 잠깐이나마 로드 사이클 선수가 되었었는데 뛰어난 자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로드 사이클의 속도감에 중독되어서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달리다보니 어쩌다 남보다는 조금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던 거지 그다지 자랑할만한 실력은 아닌 걸로.  자랑할 만한 실력이었다면 팔뚝에 태극기 달고 깃발 날렸겠지.

그 다음에 빠져든 것이 요즘 어린 친구들에게 한참 인기 있는 픽시. '후미기리'라는 물건이었는데 고정식 뒷기어를 그렇게 불렀다. 일본어 느낌이니 일본어겠거니 하지만 정확한 뜻은 모르겠다. 하여튼 앞 44, 뒤 14. 당시에 트랙 경기에 쓰이던 기어비인데 꽤 매력적인 자전거였다. 그 매력을 알기 때문에 젊은 친구들이 왜 픽시에 열광하는지 이해하는 편이다. 요즘 픽시는 디자인도 아주 세련됐드만.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픽시는 좀 위험하기는 하다. 최소한 브레이크는 달고 다니자.

한동안 픽시를 타고 다니다가 나중에는 핸들을 개조해서 산으로 끌고 올라갔었지. 아주 열악한 자전거였기 때문에 사실 제대로 된 산악 주행을 한 것은 아니었고 산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정도로 흉내만 낸 정도이지만. 지금으로 치면 그래블 바이크에 가까운 구성이었다. 핸들은 험로에서의 조향때문에 드롭바와 플랫바를 이중으로 묶은 형태로 개조했었다. 기괴한 조합의 자전거였지.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산에서 자전거를 타 본 1세대 쯤은 되지 않을까싶다.ㅋ. 물론 지금은 제대로 산악 인증을 받은 산악자전거를 갖고 산으로 올라간다. 가슴이 바싹바싹 타버려 죽을 것 같이 숨가쁜 업힐 뒤에 가파른 산길을 거칠게 내려 꽂는 그 미친 희열을 맛볼라고. 그러다가 날아가고 넘어지고 처박히는 것도 괜찮아. 그러다가 가끔은 다치기도 하지만 그런데서 오는 변태적인 쾌감도 있지. 나 살아있네? 이런 느낌인거. 하지만 깊은 상처나 골절은 오래가기는 하더라. 나이 들 수록 회복이 더디더라고. 

내 자전거들. 빨간 건 하드테일. 산도 타고 길도 타고 장도 보러가는 다목적용. 안쪽의 노란 바퀴는 풀샥. 주로 좀 더 거친 산길을 탈 때. 장비 욕심이 있는 편이라 항상 제대로 갖추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려고 하는 편이다. 언제 불쑥 나가고싶을지 몰라서 정비는 늘 잘 되어있음.. // 장비욕심에 대한 첨언- 하고싶을 때 즉시 시작 할 수 없다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라 항상 시작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심에 더 가깝다. 내 욕구 충족을 위한 필요에 의해서다. 물론 등급이 높을 수록 신뢰성도 더 높고 더 멋지고 항상성 또한 유리하기는 하다. 역시 물욕인가? ㅡ.ㅡ

 가끔은 그 '죽을 것 같은 업힐'을 하다보면 어라? 숨이 잘 안쉬어지네? 진짜 죽을 수도 있겠는데? 겁도 난다. 그러니 어지간 할 때 적당히 해라.. 내 허벅지며 종아리 곳곳에는 찍히고 긁힌 흉터가 몇 개씩 있고 몇 년 전에 다친 양쪽 엄지는 지금도 조금 불편해. 오른 손은 산에서 로프 타다가, 왼 손은 자전거로 산 타다가 다쳤지. 이런 저런 소소한 부상으로 병원 출입도 꽤 했네. 나이 많이 들기 전에 몸은 좀 아끼는 게 좋아. 돌아보면 몸을 너무 함부로 써서 후회되는 게 몇 개 있어.

3. 나는 집을 떠나 멀리 낯 선 곳에서 길을 찾아 헤메고 두리번 거리는 것도 좋고  밤이 깊도록 무턱대고 돌아다니다가 모텔 방 못구하면 차 세워두고 아무데서나 침낭 깔고 별 보고 잘 줄도 알아. 요즘은 늦은 나이에 스포츠카를 하나 구해서 잘 타고 다니는데. 고속도로며 국도며 가리지 않고 창문 다 열고 천장까지 열어놓고 달리는 차 소리 바람소리 음악소리가 난리법석으로 미쳐 날뛰는 중에 오페라 아리아 따위를 고래고래 따라부르면서 달리면 기분이 꽤 그럴 듯 해. 아주 혼자서 영화를 찍는 거지. 누가 본다면 깜짝이야 웬 미친놈이냐 욕바가지를 하겠지만 그럴리가. 누가 일부러 창문 열고 내 노래소리를 들을 리는 없잖아? 눈에 띄는 빨간차에다 자전거까지 달고 다니니 간혹 눈치를 보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뭐 어때, 민폐만 아니면 되지. 그렇다고 일부러 빨간 차를 고른 건 아니야. 처음에는 까만 걸 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지. 내가 유리하게 고를 수 있는 색이 하필 빨간 색이라고 해서 망설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지. 그래 뭐, 본의 아니게 유독 눈에 잘 띄게는 생겼다. 온 세상에 널린 것이 CCTV에 블랙박스에 ... 수틀리면 '아니, 아까 그 자전거 달고 있는 빨간차' , 그러면 오도가도 못하고 박제 되는 거지.

자전거는 왜 달고 다니냐고? 이거 여행 스타일에 따라서는 정말 요긴하게 써 먹을 수 있는 아이템임. 나는 없으면 많이 아쉬워. 전에는 앞바퀴를 떼고 안에 실을 수도 있었는데 차를 바꾸고 나서는 못실어. 뒤에다 달고 다니지. 그러게 뒷자리는 좁아터져서 자전거는 커녕 사람도 못태울 엉터리에 승차감도 딱딱해서 못쓰겠더라고? 알고 샀어. 그냥 예뻐서 산 거야. 좀 비싼 장난감으로. 성능이나 뭐 그런 건 사실 잘 몰라. 내 마음에 들면 그만이지 뭐. 때려 밟아보니까 겁나게 튀어나가기는 하더라. 그런데 딸들은 좀 불만이기는 해. 아빠 차 샀다 그랬을때는 예쁘다고 좋아라 하더니 뒤에 한 번 타 보고는 입이 댓발 나와서 다시는 안탄다는데! 천장이 낮아서 몸이 다 구겨진다나. ㅋㅋ  하여튼 뭐가 어찌됐든 각설하고 그렇게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야.

4. 그렇긴 한데 문제가 있지. 항상 발이 땅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거. 나는 그게 어디든 바닥을 딛고 있어야 안심이거든. 그러게 내가 내 욕망을 채워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뒷덜미를 잡고 있으니 억울하긴 한데 아니 이게 참 방법이 없네. 북한이 열리고 압록강을 자동차나 기차로 넘어가지 못하면 나는 이 나라를 벗어날 재주가 없다는 거야. 심지어 그 살벌한 유격장에서 유격훈련을 받으면서도 줄타기까지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쫓겨서 했었지만 맨몸으로 십 몇미터짜리 고공사다리를 오르는 코스는 죽어도 못하겠더라. 정말 죽는 게 낫지 안되겠더라고. 그 지랄맞던 유격 조교들이 겁도 없이 뻗대는 꼴등병때매 눈이 핑 돌아서 미쳐 날뛰고 욕하고 굴리고 협박해도 그래 그냥 날 죽이는 편이 빠를거다 하고 버티고 안 올라갔어. 결국에는 조교들도 개새끼 소새끼 욕하다가 포기하드만.

맞아. 높은 곳을 맨몸으로 올라가는 것은 몸에 많이 해로운 일이야. 발은 땅에 딱 붙이고 있어야 돼. 진짜 높은 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몸은 편안한 방구석에 앉아 있는데 시각적인 느낌만으로도 그게 반응이 온다니까. 언젠가는 TV 에서 중국 화산 장공잔도길에 빽빽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보여 주는데 그냥 실시간으로 욕이 튀어나왔어. 그게 대체 무슨 짓들이야. 그 뿐이냐, 패러글라이딩 윙슈트 스카이 다이빙 짚라인 번지점프 등등... 이런 걸 재미있다고 제 돈 써가면서.. 정말 대체 뭔 짓이냐고. 심지어 그러다가 떨어져 죽기까지도 하네? 그래 뭐, 그런 것들은 그래도 명색이 스포츠고 놀이 기구라고 쳐. 굳이 따지자면 산악자전거 타다가 죽는 사람도 있기는 있으니까. 그런데 루프타핑같은 건 대체 왜 그러는거야? 벼랑 끝이고 고층 건물 옥상 끄트머리에 그 맨손으로 매달려서 턱걸이는 왜 하며  물구나무를 서는 이유는 뭘까? 죽음을 무릅쓰고 하는 행동들이니만큼 내가 모르는 무슨 철학적 사회적인 동기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조회수때문에?

내사 돈 싸들고 와서 부디 가 주십사 한다 해도 어디 근처라도 가까이 가 볼 생각은 추호도 없고 의미도 없지만 어떤 악당이 쳐들어와서 너 총 맞을래 저거 탈래 협박하면 어쩌면 짚라인 까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진짜로 루프타핑 하라면 총 맞고 말지... 말 나온 김에 굳이 그.. 줄 세워 보자면 케이블카-짚라인-패러글라이딩-스카이다이빙-비행기-페루 와이나픽추나 화산 장공잔도 등 그런 길같지 않은 길들-번지점프-윙슈트-프리솔로-루프타핑 .. 대충 그러네. 내가 허용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이 케이블카 정도라니까. 그것도 어지간만하면 안타고 싶지. 얼마 전에도 삼천포 갔다가 케이블카 타기 싫어서 땀을 한 바가지나 쏟으면서 한시간을 걸어 올라갔다고.

 //고소공포증 [acrophobia]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높은 장소에 대해 국한된 공포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공포는 지나치거나(지나치게?) 비합리적이고, 지속적인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대상이나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하며,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두려움이 유발된다. 높은 곳에 가면 예외 없이 즉각적인 불안 반응이 나타나고, 심하면 공황발작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환자 본인은 이러한 공포가 너무 지나치거나(지나치게 가 맞겠지?) 비합리적임을 인식하고 있으며, 일상생활이나 직업적, 사회적 기능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정도이다.// 네이버에서 긁어왔는데 괄호 속은 '지나치게'가 맞는 거 같음. 그런데 나더러 환자래. ㅜㅜ 정신병증의 하나라는데..

어떤 사람은 아니, 높은 데를 못간다면서 그럼 산은 또 어떻게 올라가냐고 묻던데 그런 상상력이 부족한 질문은 뭐냐. 여기서  '고소(高所)'라는 것은 해발고도를 말하는게 아니고 단 몇 미터정도라도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추락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하는 거라고. 아크로포비아(acrophobia). 그러니까  acro(선단, 말단, 잘린 곳의 정점 뭐 이런 뜻)에 대한 phobia(공포) 인데 이게 고소공포증보다는 오히려 맞는 표현이지. 막연히 단순한 높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해발 천미터 이천미터 이런 산꼭대기는 하나도 안무서워.

억산 944
천황산 1189

막 뛰어 다닐 수도 있고 1915 지리산 천왕봉에서 물구나무를 설 수도 있어. 하지만 건물 옥상 가장자리는 삼층 사층만 돼도 아뜩한  거지. 이거 말이 쉽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느낌인지도 모를 걸. 정말 허리 아래쪽으로 일순간에 피가 싹 빠져나가버리는 느낌이야. 겁먹거나 용기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몸이 반응하는 거야. 공포는 겁이 많거나  담력 뭐 이런거 하고는 다른 이야기라니까. 뭐 떨어져 죽을까봐 무섭고 어쩌고 이게 아니라  위치를 인지하는 순간 즉시 몸이 얼어서 굳어버리는 거라고. 산에 미쳐서 돌아다닐 때도 나름 관록의 산싸나희라고 온갖 개폼은 잡고 다니다가 그놈의 신불산 칼바위 한 번 지나가보려다가 발 밑의 절벽을 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바람에 돌아서서 말 그대로 엉금엉금 기었었다니까.

신불산 공룡능선 칼바위

아니야. 사실은 기지도 못하고 주저앉은채로 엉덩이를 질질 끌면서 내려왔어. 정말 모양빠지던 날이었지. 그나마 궂은 날이어서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내 뒤에서 칼바위를 지나가려고 기다리던 젊은 커플은 진귀한 구경을 했지. 아니, 저 사람은 걸어가더니 기어서 돌아나오네? 뭐, 그 때도 이미 가오가 몸을 지배할만큼 젊은 나이도 아니었고 얼굴은 스카프로 가리고 있었으니까. 혹 그렇다해도 언제 다시 볼 사람도 아니고 하니 에라 모르겠다 얼굴에 철판 깔고 뭉개면서 뺑소니를 쳐버린 거지. 그러게 진작에 우회로로 갈 것이지....   

5. 뭐, 당연히 고소공포증 있다고 자랑하고 뻐기는 건 아니야. 그 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민망하고 미안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는 이야기지.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몇 번이나 제주도를 가자커니 해외여행을 가자커니 졸라대도 선뜻 확답을 못하고 있으니. 나 빼고 갔다와라 나는 괜찮노라 이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너희를 위하여 이 한 몸 살신성인의 의지로 비장한 각오로  비행기를 타는 것도 희한한 일이고...  언젠가 같이 가까운 일본이라도 갔다 오자던 어떤 친구는 위스키를 병째로 몇 병 나발 불고 술김에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을 거라던데 웃기기는 했지만 그건 그래도 점잖은 편이야. 우리집 큰 놈은 아빠 뒷통수를 갈겨서 기절 시킨채로 비행기에 실으면 되겠다던데. 흉악한 놈.

저것들은 고소공포증이 없나? 날개만 있으면 다 해결되나?

여행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아이고 우리나라에도 좋은 곳 많아요 라고 설레발을 치지만, 그래,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 아니긴 한데 그걸 누가 몰라. 당연히 나도 나가고 싶지. 난들 여행이 좋아서 길거나 짧거나 틈만 나면 집 나가고 싶어서 발사심을 하는 인간인데 욕심이 없겠냐고. 나도 세상의 모든 골목을 가 보고 싶은 사람이야. 형편없는 솜씨라도 그런 별별 사진들을 내 느낌대로 내 카메라에 담아 오고싶고. 신기한 음식도 먹어보고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세상도 보고싶다고. 가슴이 뻥 터져버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대자연도 만나서 내가 이런 멋진 세상에 살고 있었구나 알고 싶고 내가 보고 싶은 곳을 같이 보고싶어하는 나를 닮은 사람들과도 만나보고 싶다고.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 적응을 해버린 것이지 욕심마저 없는 건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 갈 수만 있다면 가고싶은 곳이야 쌔고쌨지.

그런데 얼마전에 정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어. 나 어쩌면 파타고니아 갈려고. 갈 수만 있다면 말이지.  TV에서 파타고니아에 있는 스텝이라는 지형을 봤는데,  나, 거기 꼭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프랑스의 어느 가문은 그 가문 전부가 통째로 그리로 이주를 해서 정착을 했다던데! 몰라, 정작 가 보면 마음만큼 그리 좋지는 않아서 내가 이꼴을 볼라고 천리 만리를 날아왔구나 발등을 찍을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북미쪽을 더러 다니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한국에서 거기 가려면 남미 직항이 없어 비행기를 네번 타야한다면서 너 가다가 죽을거야 그러던데. 그럼 나는 가면 못 돌아오는 거겠지? 아니면 죽을 날을 받아놓고 가든지..

운문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산 아래 동네. 상양리? 하양리?

자식들한테 제사상 못받을까봐 걱정은 아니니까 그건 문제가 아닌데  아니, 진짜로 그럴 수도 있다니까. 할 수만 있다면 자동차 꽁무니에 자전거 얹어서 무사히 갔다가 살아서 돌아오고싶지만 뭔 연륙교가 있는 곳도 아니고 있다 해도 석달 열흘 죽어라 달려야 겨우 닿을까말까한 거리라서. 게다가 어느 동네는 무시무시한 마약이며 갱단이 득시글거린다던데 가는 도중에 어느 오지에서  타이어 빵꾸라도 나버리면 카센타 찾는다고 두리번 거리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쓱싹... ㅎㅎ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아니 참, 정말 가려면 갈 수는 있겠지만 참 가능성도 희박하고 그만한 각오를 감수하고라도 가야하나 싶기도 하고. 나도 내 마음을 몰라. 가기는 어찌어찌 갔다 하더라도 그다음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는 어떻게 타냐고. 그래서 하다하다 그 프로그램에서 잠깐 비치던 그 못견디게 쓸쓸하고 황량한 먼지바람불던 파타고니아 인근 동네 길가의 오두막에다 방을 하나 얻어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밥 해먹으면서 여생을 보내볼까 하고 상상인지 망상인지까지 해봤더라니까. 참, 내가 생각해도 그걸 생각이랍시고 하고 있는 건지.

몰라. 살 날이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또 모르는 일이지. 어느 날 마음이 후다닥 뒤집히면 무슨 똥배짱으로 가방 챙겨서 비행기에 덜렁 올라설지도 모르지. ...그래도 혹시 비행기는 한 번만 타고 나머지는 자동차로 가는 꼼수는 없을까? 미국에서 직선거리로 얼추 20000km... 구불텅 남미 대륙을 자동차로 냅다 달리면 하루에 이 삼백 키로... 어디보자....  안되겠다. 그냥 배 타고 가까?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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