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밑에 메주가 달리기 시작했다.
한 해 농사가 끝났다는 이야기다.
농사도 지을 줄 모르고 농사에 대해서는 개 코도 아는 바 없지만
촌에서 한 이십년 살다보니 얼추 그리 짐작이 가더라.


농사건 뭐건 다 사람이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며
살아 보니 그 먹고 사는 일의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장(醬)이더라.
장이 맛이 없으면 한 해를 시달리고
장이 잘 되면 한 해가 입이 즐겁다.
장이 맛있으면 한 해 입 걱정을 덜고 장이 잘 못 되면 한 해 근심을 달고 사는 법이지.  

가을 들판이 비고 하늘에 철새들이 날고
그리하여 논 농사 밭 농사 다 거두고 나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메주.

한 해 농사의 끝은 메주.
그리고 한 해 농사의 시작은 정월 장 담그기.
 

얼마 지나면 집집마다 줄줄이 달리겠지만
일단은 눈에 보이는 첫 집의 메주를 기념하여.


......

추신/
이맘 때면 달리기 시작하는 메주는,
댓돌 아래 가지런한 비니루 슬리퍼처럼
해만 지면 아득히 잦아들어서 깜깜한 지붕 아래 간신히 어른거리는 푸르스름한 TV 불빛이 또한 그렇듯이
인기척도 없이 쥐 죽은 듯 고요한 그 집에 아직 사람이 살아 있어 양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깃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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