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신발을 만든다는 생각으로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다.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야 한다.'


언젠가 어떤 갖신쟁이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한 말이다. 이름 뒤에 무슨 번호도 붙은 국가 공인 갖신 장인이라던가.
나 같은 사이비가 일생을 두고 한 가지만 매만져 온 장인의 심오한 정신을 쉽사리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단순히 신발을 만든다는 생각으로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다.' 는 말에는 그다지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것이 신발이라면 가장 먼저 신발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바꿔 듣자면 그 사람의 말은 단순한 ‘신발’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 말이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세칭 ‘예술가’들의 ‘예술적 오만’은 아니었을까?
나는 신발을 제대로 만든다는 생각으로 기능이 우선하다 보면 자연히 기능에 따른 아름다움이 배어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것이 꼭 신발이 아닌 그 무엇이더라도.)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연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고 신발로서의 충실한 기능보다는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작품성에 지우치게 되어 정작 신발이 가져야 할 본연의 미덕인 발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감싸는 역할에는 등한시 될 것이 아닌가.
신발이 신발로서의 기능보다 작품으로서의 그것이 우선하게 되면 발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감싸고 보호한다는 원래의 본분을 잃고 발 보다 훨씬 높은 곳에 제 할 일을 잃고 진열되어 호사를 누리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하나의 작품으로 아름다운 신발을 빚어내어 세간에 널리 보이는 것도 또한 가치 있는 일이겠지만 튼튼하고 편안한 신발을 발에 잘 맞게 맞춰 신고 거친 땅 위를 걸어 낡고 헤지면서 천천히 배어나오는, 그 자연스러운 마모가 주는 친숙한 아름다움 또한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신발은 신어야 신발이고 그릇은 온갖 물건을 담고 비울 수 있어야 하며 북은 쳐서 소리를 내야 북이다. 도난방지 유리 진열장 속에 북채와 헤어져 덩그러니 걸려있는 북은 이미 북이 아니라 '옛날 옛적 그 언젠가 북으로 쓰였던 물건'일 뿐인 것이다.

나는 이전부터 공예적 수준의 물건들에는 어쩐지 호감이 가지 않았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보고나서 비로소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 할 수 있었다.
박물관이건 여염집이건 대단히 화려하고 엄밀한 장식성을 자랑하는 물건들의 모습이 그 길고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당시의 반듯하고 말짱한 모습을 온전히 받아 간직하여 장식장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까닭 없이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보다는 어딘가 답답하고 지겹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이 생활에서 멀어짐으로 나타나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사람의 손에 부대끼며 닳아가는 생활 도구로서의 그것들이 아니라 다칠라 깨질라 어화둥둥 모셔놓고 조심조심 보존하며 완상하기 위한 공예품적인 그것이 되고야 만 것을 나는 오히려 답답해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러니 나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 쓰이고 부딪히고 닳아가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장식이 필요하다면 기능이 완성되고 난 이후에 기능과 기능미를 다치거나 넘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기능을 따라 흘러가는 최소한의 장식이 좋지 않을까.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기능적인 구조가 아름답게 배열되어 더 이상의 군더더기의 장식이 필요치 않은 경우다. 대개 완성도가 높은 물건들은 기능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생활에서 늘 가까이하는 물건들도 어지간만 하면 중고품을 별로 꺼려하지 않고 때로는 오히려 새 것보다 더 정겨워하는 것도 이런 데서 나온 습성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나는 옷을 사러 가서도 나는 헌 옷 같은 느낌이 드는 옷을 먼저 집어 든다. 편하니까. 신발도 그렇고 집에서 쓰는 가구들도 마음에 들기만 하면 재활용 센터에서 덜렁 주워 오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애 엄마는 궁상이라고 질색팔색을 하지만.
또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단골집 몇 곳을 줄기차게 반복해서 간다. 갔던 곳을 또 가는 것이 새 밥을 찾아 헤매는 것 보다는 얼마나 편안한가 말이다. 물건이건 생활이건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겠지.


허구헌날 만지고 쑤셔대는 오디오는 어떤가. 내 기억으로는 새 것을 사 본 것이 한 번인지 두 번인지? 명색이 오디오라는 것에 눈을 뜨고 난 뒤로는 새 것을 사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물론 새 것에 비해 값이 싸다는 것도 큰 매력이지만 같은 값을 주고라도 뒷 세대의 물건들에는 선뜻 손이 나가지를 않는다. 요즘 만들어내는 그렇고 그런 물건들의 만듦새며 디자인들은 한 세대 이전의 물건들에 비하면 일단 그 관능적인 느낌에서 많이 가볍다.(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뿐만 아니라 상당한 고가의 물건들도 그 디자인은 같은 급수의 예전 물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지금 쓰고 있는 물건만 해도 십여 년 지난 물건들이 대부분에다가 심지어는 삼사십년 묵은 물건들도 있다. 당연히 외관이 조금 낡았다는 것 외에는 기능이나 만족감에 하등 하자가 없다. 오히려 요즘의 날렵하고 어딘지 얍삽해 보이는 디자인과는 다른 구시대의 투박하면서도 진지한 디자인에 저으기 만족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아, 물론 진공관 앰프의 관 이름을 새겨 둔 글자가 지워져서 형번을 찾아 내느라고 진공관을 뽑아 들고 가재미 눈으로 끙끙 앓아보기는 했다.


하지만 중고 물건들에도 이상하게 배짱이 맞지 않는 물건들은 있다.
낡은 품새며 손때들이 어쩐지 내 그것과는 곱게 오버랩 되지 못하고 사납게 느껴지는 물건들 말이다.
아마도 주인을 잘 못 만나 이 손 저 손 하염없이 흘러 다니면서 거칠고 험악하게 다뤄졌거나 대단히 부주의한 사람을 만나 끔찍한 자상을 입거나 심한 타박상으로 몰골이 바뀌어버린 물건들은 그 외관에서도 내, 이렇게 모진 풍상을 겪었노라는 고약한 성정이 배어 정내미가 뚝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잘한 일상에 부딪히고 시달려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낡음’을 갖고 있는 물건들은 잡티 하나 없이 번쩍거리는 '신품 동(新品 同)'의 물건보다 편안하다. 그 편안함은 친숙함과 취급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중고 물건을 하나 갖게 되면 한동안 그 물건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닦고 매만진다.
내가 알지 못했던 좋은 점이 보이면 기꺼워하기도 하고
혹 조금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다듬어 보기도 한다.
내 나름대로 새로운 물건에 정을 붙이는 방법이다.
그러다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손에서 사랑을 받다가 또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 내 손에 들어오게 된 연유를 가만히 그려보기도 하고 크고 작은 흠집이나 닳은 자국에 묻혀 있을 얼굴도 모르는 그들의 풍상이나 내가 알지 못하는 갖가지 사연들을 상상해 보기도 하는데, 그럴 여지가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이 세월의 흔적을 담은채로 내 눈 앞에 온전히 놓여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멋진 매력인가.


그렇다고 중고품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더라.
몇 년 전에 동해안의 바닷가에 있는 어느 밥집에 묵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낮은 구릉에 바다를 보고 앉은 일견 고즈넉한 너와집이어서 바깥 풍경은 썩 나쁘지 않았으나 정작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물레며 죽부인이며 다듬돌에 다듬이 방망이까지 구색으로 갖추어 놓고 가마니 틀에다 골자리 틀이니 이런 보기 어려운 옛것들이 방 한가득 걸리고 쌓여 있는데 그 물건들의 계통 없는 놓임새며 모습들이 우격다짐으로 갖다 재어놓은 창고를 연상케하여 도무지 정겹지 못하고 저희들끼리도 따로 노는 듯 느꼈었다.


쓰일 곳에 쓰이고 놓일 곳에 놓여야 틀이 잡히는 물건들, 물론 그것들이 사람이 쓰던 물건이 아니었더라면 아예 돌아 볼 것도 없었겠지만 중고품들이 갖고 있는 매력은 그것들을 썼던 사람들의 손자국이고 풍상의 흔적도 그렇지만 그것들을 느낄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 엉터리 한지를 바른 방 한 구석에 한두 가지 물건이라도 다소곳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었더라면 모르긴 해도 나는 저으기 안도하며 아주 편안하게 허리띠를 풀고 묵밥을 먹고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헛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이 그렇게 마구잡이로 귀신 나올 듯 쌓아 둔 모습은 끌어다 모으는 욕심은 넘치면서 맵시 있게 쓸 줄은 모르는 요즘 사람들의 몰취미를 그대로 보는 듯해서 그냥 신기한 구경거리로만 일별하고 말아, 그나마 맛이 괜찮았던 파전도 두어 점 뜯어 먹고는 그냥 일어서고 말았을 뿐이다.


그래도 그 집 마루 한 켠에 되는대로 쌓아 두었던 누군가의 젓가락 자국이 남은 양은 도시락이며 중고등학생용 책가방, 모표 달린 모자 같은 물건들은 강시처럼 썰렁하게 묵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는 했었어도 한 때 나도 직접 만지고 부대껴 봤던 물건들이라 불현 듯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애틋하게 쓰다듬어 본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목공소에서 새 것을 깎아다가 진열 해 둔 것 보다야 훨씬 낫지.
그렇고말고. 옛 것들이야 상태만 좋다면 묵은 것이 낫다. 타임캡슐에 진공 포장을 해 두었다가 훗날에 기념할 일이 아니라면 그저 사람의 손때가 묻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중고품을 마다하지 않는다. 손때 묻지 않은 말짱한 새 것이야 꼴은 멀쩡하겠지만 몇 백 년 묵은 무덤에서 느닷없이 불쑥 불거진 무슨 부장품같이 그 생경하고 메떨어진 느낌은 다소 끔찍하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그 갖신 장인이 만든 신발도 발에 잘 맞는 이가 신어보면 아연 그 아름답고 정교한 솜씨에 대단히 만족하면서 아껴 신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 아마도 그렇지 않겠는가. 명색이 장인이라는 칭호가 시정잡배며 우수마발에 계통 없이 되는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닐테니까. 그런데도 내가 끝끝내 마뜩치 않아서 앙앙불락하는 것은 그런 장인이 만든 훌륭한 신발이 정작 사람의 발에 신겨져서 흙 맛을 보지 못한 채로 고스란히 진열장에 갇혀서 미이라처럼 일생을 보낼 생각을 하니 마냥 답답하고 안쓰러워 그래 보는 것일 게다. 아무리 그래도 그저 신발은 신어야 맛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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