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오며 가며 음악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학 생활을 하다가 어느 해 쯤엔가 드디어 그런대로 오디오 냄새가 나는 물건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가지고 있던 양철쪼가리 오디오가 수명을 다하면서 하나씩 사라지고 난 다음 한동안을 소리를 듣지 못해서 전전긍긍 하다가 아르바이트 반 아버지께 공갈 반 등등으로 간신히 마련했지요.

앰프/ 인켈AK 625 (요즘도 심심찮게 인터넷 장터에 거래되는 AK 650의 동생뻘입니다.
그 때야 황홀했던 건 당연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냥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까만색의 타원형 푸시버튼이 접점 불량이라 애를 먹었지만.)
스피커/ 역시 인켈. 모델은 기억나지 않고 유닛이 한국 마샬의 것으로 박혀 있었습니다.
10인치 우퍼가 달린 3-Way였는데 일단 모양은 그저 그랬고 덩치와 무게는 봐줄 만 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인켈 상표만 붙은 12인치 양은 플래터가 얹힌 허깨비 턴테이블.
카드리지는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 piezo YM-121


싸구려 턴테이블에 딸려 나온 이 별 것 아닌 카드리지가 왜 기억에 남아있나 하면 먼저 이야기했던 그 무시무시한 ‘엘피 절삭용’ 세라믹 압전형 바늘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디오를 새로 구입한 기념으로 거금을 들여서 새로 사온 라이센스 판 위에 처음으로 그 piezo YM-121라는 마그네틱 카드리지를 올려놓는 순간 압전형 바늘의 경직되고 불안한 움직임과는 달리 조금씩 휘청거리는 듯 소리 없이 트래킹하는 그 자태와 부드럽고 청아한 소리를 듣는 순간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물 핑 돌았을 만큼 감동 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그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서 만든 얼마 정도의 물건인지도 모르면서.

이 때 들었던 엘피가 장드롱 연주의 바하 첼로 조곡입니다. 이 엘피는 지금도 내 장서에 건재하고 있으며 꽤 자주 돌려 댄 음반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깨끗하고 깊은 음질을 유지하고 있어 나는 아주 흡족해 하고 있습니다. 해설집이나 명반 가이드 같은데서 이 장드롱의 연주를 본 적은 없지만 그 노래하듯 유려한 보잉이며 유장하고 부드러운 해석은 여타의 거장들과 비견해서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명연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박박 우겨봅니다.


이후로 몇 달 동안의 꿈결같은 음악과의 동거.
친구들과 소주 몇 잔을 나누고 돌아 온 늦은 저녁에 작은 스탠드 불빛만을 밝힌 채 콧구멍만 한 내 골방에서 조용히 흘려 듣는 바하는 열락이었습니다. ....그 뼈마디 저리던 열락이여...
...
적어도 그 소중한 오디오를 내 방에 잠궈 두고 까까머리 장정으로 변신해서 입영열차를 탈 때까지만 말입니다.


김포반도 끄트머리 임진강 하류, 강화도 부근.
멀리 아심하게 우렁찬 한국화약 굴뚝이 보이고 밤이면 바닷물 소리에 두견이만 우는 곳.
말이 좋아 해안경비지 이게 무슨 해안이야.
만조 때나 겨우 발밑에 찰싹거리는 바닷물 구경. 물 빠지면 갯냄새 진동을 하는 진흙 구덩이 갯벌.
그늘이라고는 지푸라기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 소금기 버석이는 갯벌에서 조석으로 노가다,
말뚝에 되똑 올라앉아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개망둥어(짱뚱어)와 먹지도 못하는 외다리 게딱지.
1미터가 넘는 붉고 푸른 갯지렁이, 니가 무슨 지렁이야 거의 뱀이드만.
한 발 빠지면 두발 곧 이내 빠져야하는,
그리하여 파충류처럼 벌벌 기어야 살아 돌아 올 수 있는 곳.
아아 여보시오. 여기는 또 다른 혹성. 생존 해 있는 지구인은 응답 하시오.
분 냄새 나는 애인은 면회도 안 오고 말이야. 염병.

씩씩하게 건빵을 물고 국방의 의무에 전념하던 육군 100번 알보병.
대한민국 국방의 초석 육군 일등병이었던 나는 꼴등병때 통합병원에 누워 듣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부대로 갖고 오지 못하게 되어 곧 음악에 대한 금단증상 때문에 마음고생을 자심하게 하게 되었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지금은 어디서 구했었는지 기억도 희미한 초소형 라디오를 외박 길에 하나 구해갖고 왔습니다. 이건 지금의 초박형 전자계산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인데 백원짜리 상아색 이어폰 -진정한 빈티지 이어폰- 을 반드시 꽂아야만 한쪽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겉모양도 계산기와 너무 닮아 정말 전자계산기같이 비닐로 된 수첩 표지 같은 것이 덮여 있었는데 접어서 전투복 상의의 가슴팍 주머니에 넣으면 거의 있는지 없는지 자국이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얇고 작았습니다. 아마도 보나마나 일본 것이었겠지요?

하여튼 어디선가 이걸 하나 구해서 야간 입초 때마다 멀리 김포 공항으로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의 불빛을 보면서 한 쪽 귀로는 주번사관의 순찰을 살피고 남은 한 쪽 귀로는 심야 음악방송을 들으면서 혼자 득의만만 기꺼워했습니다.
하지만 이 물건은 워낙에 두께를 줄이려다 그리되었는지 도대체 서울 인근에서도 방향을 얼마나 심하게 타는지 지글거리기 시작 할 때는 방향 잡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거기다가 참
호 속에 폭 파묻혀서 눈만 빼꼼 불빛이라고는 없는 새까만 갯펄이며 바다 쪽을 보고 있어야 하는 처지에 방향 잡느라 뒤돌아서서 라디오를 듣자하면 그게 소린들 제대로 들리겠으며 또 휑하니 비워 둔 뒤통수는 간첩이 오는지 구신이 오는지 뒤숭숭하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몇 달을 올빼미로 살다보니 해 뜨면 터덜터덜 둑길 걸어 돌아와서 오전 한 때 비몽사몽 자고 일어나 잠만 깨면 삽 들고 노가다에 보수작업인데 해만 뜨면 음악은 뭔 음악. 다만 점심시간 시작을 알리는 연병장 가득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엄정행의 오오 내 사랑 목련화만 수도 없이 피고지고 그랬지요. 그래서 나는 지금도 엄정행이나 목련화 노래만 생각하면 바로 그 땡볕 자욱하던 시뻘건 연병장만 생각납니다.

그렇게 음악과 슬슬 뜸해져가던 어느 날 서울 시내로 외박을 나갔던 나는 딱히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었던지라 귀동냥으로 주워들었던 명동의 필하모니를 물어물어 찾아 갔습니다. 군바리 외박에 혼자서 음악 감상실이라.... 참 주변머리 없는 육군 쫄병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날 일생을 두고 벗어나지 못할 깊은 내상을 입게 됩니다. 
명동 필하모니의 그 야박하도록 두꺼운 크리스탈 유리잔에 부어 주는 음료수 한 잔을 앞에 놓고 침침한 감상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 참 간만의 호젓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습니다. 몇 곡 듣는 척 하다가 졸다가 거의 잠결이었는데 그 잠결에 가슴을 제대로 울리는 낮은 피아노 소리를 듣고는 화닥닥 잠이 깨어버렸습니다. 분명 낯익은 곡인데 이게 왜 새삼스럽게 가슴을 쿵 내려 앉히는 거냐는 말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이었습니다. 1악장 도입부의 피아노의 어둡고 깊은 타건. 처음으로 음악이 아닌 '소리'를 듣게 된 경험이었습니다.
리히테르의 연주였습니다. 
막간에 오디오실을 찾아가서 음반 자켓을 보여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요. 그 때까지는 이 음반만 구해 얹으면 그래도 비슷한 소리는 나와 줄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전역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렵사리 이 음반을 구해서 내 오디오에 얹어 보고는 아니나 다를까 아주 좌절하고 말았지요. 그렇게 좋기만 하던 내 오디오는 이제 아주 천덕꾸러기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제대로 노래도 못하는 것이 왜 쓸 데 없이 덩치만 크냐고...
내가 고향을 떠나 있던 사이에 집 부근에 새로 생겨 있던 작은 찻집이 내 병을 아주 부채질을 해 대는데, 내 또래의 젊은 친구가 주인장이었던 그 찻집에는 내 인켈 스피커의 절반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조그마한 AR 북셀프에 불빛도 흐릿한 구닥다리 산스이 리시버를 물려서 가라드 턴테이블로 비닐 레코드들을 돌려대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아주 가당찮았거든요.


별로 값나가지 않는 물건들로 절묘한 소리를 들려주었지요. 모델을 기억하지 못하는 좀 묵직해 보이는 일제 산스이 리시버 앰프에다 가라드 턴테이블(301 이니 이런 유명한 것은 아니었고 그 보다는 조금 하위 기종으로 보였습니다.)에 슈어 91을 달아서 AR-4X를 울리고 있었는데 이게 참 절세의 매칭이었습니다. 따뜻하면서도 흐리멍덩하지 않은 그 속 깊은 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군 제대 후에 복학때까지 애매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그 곰팡내 나는 지하 찻집에서 하루 일과를 보내기로 굳게 결심을 했지요.

밤이 늦도록 그 찻집에서 뭉기적거리는 날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곳의 골수 당원들과도 교분을 트게 되었고 내 방에서 엄격한 출입금지 처분을 받고 있던 내 소중한 LP들이 이제는 뻔질나게 그 곳을 드나듭니다. 물론 밤늦은 시각, 문을 닫은 뒤에는 소주와 깡통 안주와 컵라면 따위로 성찬을 마련하고는 밤을 새워 입씨름을 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아, 물론 그 때의 입씨름은 오디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 때 만큼은 오디오에 관한 한 더 이상의 소리도 욕심나지 않았고 남쪽 끄트머리의 작은 소도시에서는 욕심을 내 본들 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밤이 늦도록 몇 몇 악당들과 소주를 마시면서 기염을 토하는 일이 피 끓는 백수 시절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괜찮은 백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껏 나름대로 음악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줄기를 잡게 된 것이 그 때의 그 늦은 시간들이 내게 남겨주고 간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때때로 그 시간들과 사람들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 찻집 주방에서 잘 생긴 얼굴로 커피를 끓이면서 나무 숟가락을 들고 열심히 지휘를 하던 아르바이트 주방장은 지금도 때때로 가족을 대동하고 만납니다. 때로는 학교 동창이나 옛 친구들보다 더 허물이 없이 편안하기도 합니다. 음악이 얽어 준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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