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일찍 자고 싶어도 늘 늦다.
몸이 곤하여 자리에 누워 그냥 그대로 잠들면 얼마나 좋으리. 오랜만에 숙면으로 몸을 개운하게 하고싶다.

'삼쾌'만 되어지면 아이는 별 걱정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도 잘 안다. 쾌식, 쾌변, 쾌면이다. 지극히 타당하고 합당한 말이다. 육아의 기법(?)중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명백한 거의 최고의 금언이다. 더욱이 어른에게조차 더 이상의 첨언이 필요 없을 건강의 삼원색이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면 얼마나 몸이 개운할까!

나는 잠이 짧은 것이 체질화 되어버린 데다 그나마 잠귀마저 밝아서 좀처럼 숙면에 빠져들지를 못한다. 그런데 편법이기는 하나 방법이 있기는 있다. 심신이 부대낄 때 적량의 알콜을 첨가하면 그만 벼락같이 코를 골며 서너 시간을 뻗어버린다. (코를 곤다는 것은 들은 풍문일 뿐 도저히 내가 확인 할 길이 없다.) 다만 가까운 사람들이 음주가무 뒤에는 내 곁에 자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걸로 봐서는 낭설은 아닌 듯하다.

나는 잠들기가 힘들어지는 밤이면 자주 술을 찾는다. 속병이 나서 한동안 술을 멀리 했더니 이제는 술이 적적해서 나를 찾는 모양이다. 그래. 반갑구나. 기왕에 만났으니 천년만년 살고지고.
뭔 놈의 술을 참 겁나게도 마셔댔던 시절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저 놈 술 세더라고 추켜세우면 무슨 벼슬 얻은 듯 우쭐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창피하고 한심한 일이다. 그리 철딱서니 없이 살다가 결국은 몸이 견디지를 못하고 서른 안팎 언저리에서 두어 번 호된 꼴을 보고야 말았다.
그 뒤로 술이 거의 일할 정도로 꺾여버렸다. 이제는 술이 무섭다.
지금도 굳이 작정을 하자면 어지간한 주량으로 마시고 즐길 수는 있으되 그 뒷날이 도대체 수습이 안 되니까. 썩어도 준치라고 몇 번 버텨봤지만 이제는 뒷날을 생각하면 그만 손사래를 치고 꽁무니를 뺀다. 자연히 술잔에 손이 뜸 할 밖에.

게다가 그다지 강건하지 못한 체질도 단단히 한몫을 한다. 한 밤의 유흥이 끝난 뒤 쪼개질 듯 지끈거리는 머리에 물기 하나 없이 종잇장처럼 말라 비틀어진 혓바닥, 목구멍에서는 썩은 홍시냄새가 진동하는데다 시도 때도 없이 아랫배가 사르르 뒤틀려 오는 아침을 맞노라면 뭐 굳이 지옥을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 나는 지옥이 있다면 두통 지옥하고 설사 지옥이 그 중 무서울 거라고 생각한다.
설사....... 무섭다. 그거 며칠 하고나면 살이 쑥 내린다. 핼쓱해지고말고.
하지만 지금까지도 술을 저주하거나 원망해 본 적은 없다. 염병할, 그 팍팍하던 시절을, 그 팍팍하던 시대를 눈물어린 술잔 없이 어찌 살아왔을 거란 건가 말이다.

아. 이 역시 장삼이사 핫바지 출신의 범부임에 지껄이는 헛소리인 것은 잘 알고 있다. 누구라 그 황량한 시절에 그런 무용담 한 보따리 품지 않은 자, 그런 아릿한 기억들 전설처럼 가슴에 품고 허위허위 살아오지 않은 사람 있을까보냐. 낯 간지러운 무용담은 각설하자. 다만, 기왕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술버릇. 이거 한 번 짚고 넘어가자.

자랑하고자 해서도 안 되고 자랑하고자 할 건덕지도 안 되는 사안이지만 나는 이것에 특히나 민감하다.
일단, 부푸
는 풍선껌처럼 풀 세운 목에 턱을 땡기고 장광설에 도덕 강의까지 겸하는 대가연 형. 이건 아주 거룩하다. 술자리가 지겨워져서 가능한 빨리 파하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독특한 방법으로 동석의 인사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깨우쳐 주는 계몽주의 형도 있다. 그 방법이 매우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것이 특이하다. 반면교사 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시도 때도 없이 으르릉거리며 털을 세우고 근육을 부풀리는 투사형도 있다. 때로는 실제 물리적으로 놀기도 한다. 종국에는 인간이 비닐 봉지에 담긴 고깃덩어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처절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콤플렉스로 똘똘 무장한 꽈배기 형도 있다. 이 유형은 때때로 가시가 돋혀 있는 경우가 많다. 꽤 신간스럽고 많이 짜증스러운 경우다.

모든 것을 망라해서 완전히 망가지고 마는 종합 선물세트도 있다. 이는 심신이 같이 그러하므로 동석의 인물들을 취중에 과중한 노동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 중 압권이 될만한 유형은 중언부언 형이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자는 척하면 깨워서 하고 변소 가면 따라 오면서 하고 딴 짓하면 소매 끌고 가서 또 한다. 그냥 한 두 번 겪고 나면 같이 안 마신다. 그게 피차에 이롭다.

깨고 나면 멀쩡한 사람이지만 술만 취하면 금수로 변하는 몇 가지 인품들은 정말 싫다.
에라 인간아 취중 인품이 그따위 밖에 안 되냐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그런 건 정말 싫다. 왜 취중에는 내 빈정을 상해 가면서까지 필요 이상으로 관대해져야 하지? 나는 주석은 무조건 유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돈 날리며, 시간 죽이며, 건강까지 담보로 해 놓고 벌이는 술판이 기분마저 오지게 망가진다면 그게 어디 멀쩡한 사람이 자진해서 할 짓인가 말이다. 나는 그리 믿는다. 술에 씻겨서 화장이 지워지는 거라고.

하긴 유독 화장이 진해서 좀처럼 분칠이 지워지지 않는 유형도 있을 수 있겠다. 탱탱 큰 소리치는 내가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뭐 하지만 그 정도 세척에도 벗겨지지 않는 변장 수준의 특수 화장이라면 일생을 그리 살아도 별 탓할 일은 없지 않을까! ......☜호언 장담이 뒤끝이 좋은 경우는 대체로 없는데....

그렇다고 앞 뒤 싹둑 잘라 낸 맨드름이가 어디 있나. 나도 과거를 들춰보면 낯 뜨겁고 망신스러운 전과가 더러더러 담장에 호박같이 대롱대롱 달려 있기는 하다. 그런 주제에 반찬 투정 하듯 시치미 떼고 앉아서 남 탓하는 것도 사실 남사스럽고 웃기는 노릇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사는 것도 사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술자리만큼은 결사적으로 유쾌하게, 필사적으로, 목숨 걸고, 환장할 만큼 즐겁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미망인지, 삶이라는 것이 미망 속에 허우적거리는 것인지, 이것인지 저것인지도 모르는 것이 미망인지, 아둔한 머리로 뭘 알겠노라고 애써봤자 손에 잡히는 것은 없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결사적으로 유쾌하게!! 

하여튼 술이란 게 요물이지.
소화제, 마취제, 수면제, 하제, 독약에 마약에 때로는 미약으로도 쓰이는 걸 보면.....
그래도 인간세계에 술이란 물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다들 사이보그 같이 맨질맨질한 얼굴로 네모 반듯하게 살아가지 않을까. 아, 그건 좀 끔찍하다. 차라리 술주정이라도 하는 게 나을지. 그래도 저 재활용도 안될 더러운 버릇들은 좀 안봤으면 해. 정말 싫거든.

사실은 어젯 밤에도 잠이 안 와서 혼자 한 잔 했다. 소싯적 같이 소금 놓고 깡술 먹는 호기는 꿈도 못 꾸고 안주가 없어서 급조한 얄궂은 안주로 먹었더니 아직도 뱃속이 편찮다. 그래서 또 헛소릴 하는 건가 보다.
저 산은 꿈쩍도 않는데 나는 왜 바람에 깃발처럼 나부끼고 혼자 앓고 있는지 속이 상하고 울적해서, 그래서 마셨다. 마시고 나서 깨어보니 꼭 나 혼자만 손해 본 것 같아서 공연히 술에다 시비를 걸어 보는 거지. 너 또 마실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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