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로에서 열한 살 사츠키가 길을 잃은 네 살짜리 동생 메이를 찾아서 벌판을 헤매다가 초조한 마음으로 언덕 위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는 장면이다.
병원에서 요양중인 어머니에 대한 걱정에, 길을 잃은 동생에 대한 걱정, 그리고 이제 곧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 이런 바닥없는 근심들을 기우는 저녁햇살로 귀신같이 그려놓은 빛의 묘사.
아이들과 무심히 ‘토토로’라는 만화영화를 보고 있던 나는 저 장면이 지나치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런 섬찟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동시대의 인류라는 점에서는 감사한 일이고 내가 한국인인 반면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일본인이라는 점에서는 샘나는 일이었다. 사람의 눈을 희롱하는 빛의 장난을 정말 저 정도로 철저하게 궤뚫고 있다니.
파문 없이 조용히 흐르는 도랑물의 묘사나 밤바람에 골함석 지붕이 휘어져 떨리는 장면들은 그 장면 자체의 묘사도 압도적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장면 하나 하나가 스토리 전체의 바닥을 든든하게 깔아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끄덕끄덕 할 일이다.
큰 아이가 어렸을 때 사흘 밤낮을 졸리다 못해 둘리를 사 주었던 나는 딱 두 번인가 돌려보고는 그 테이프를 감춰버렸었다.
만화책 둘리는 나름대로 간결한 구성과 캐릭터의 친밀함으로 참 재미있게 본 만화였는데 장편 만화영화로 바뀌어 나온 둘리는 참...
글쎄. 나와는 다르게 장편 만화영화로 나온 둘리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영화건 만화건 또 소설이건 간에 등장 인물의 성격이 일관성을 잃거나, 상황의 흐름이 필연적이지 못하고 작위적인 느낌이 들면 그만 손발이 근질거려서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만화책 둘리와는 달리 애니메이션 둘리는 그 이야기의 설정 자체가 느닷없었고 비약과 과장의 정도가 좀 심해서 아이에게 보여주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 했었던 거지.(매우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해 애를 썼다.)
종이 만화에서의 둘리는 친근하고 유쾌한 친구였는데 만화영화에 등장한 둘리는 종이 만화의 그 개구쟁이 둘리가 아니었다. 개구쟁이라기보다는 거의 성격 파탄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시대를 내세울만한 환쟁이들이 즐비하고 칼날처럼 예리하던 장욱진과 박수근을 낳은 나라인데. 더 가까이에는 허영만도 있고 고우영도 있지 않은가.
언젠가는, 아직은 요원해보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를 능가할 날이 오기는 오.......겠지?
정말로 왜놈들이 쇠말뚝을 박아서 아직 안 되는 걸까?
부록/ 토토로의 더빙에 관하여
밥상 차려서 코앞에 밀어 준 작품에 더빙을 어떻게 그렇게 할 생각을 했을까.
차라리 한글 자막을 그대로 더빙하는 것이 나을 뻔 했다.
여기저기 나타나는 오버 액션들.
인간의 기본적인 감성을 조금도 배려하지 못하는 아둔함.
아.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