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또 다른 패거리

정체불명(학과 불명)의 여학생 패거리.
바쁜 점심시간에 여섯인지 일곱인지 우르르 들어와서 테이블 두 개 차지하고는
'나는 안 마실래요.' '나도' '나도'....... 맨 마지막에 남은 여학생,
'그라모 내는 마시야 되나? 가스나들... 아저씨, 나도 안마시고 싶은데.'

이런 정신없는 놈들, 커피 마시기 싫다면서 커피 집에는 뭐하러 왔노? 공원으로 가거라.
그날 내가 그 패거리들에게 커피 팔았을까요 안 팔았을까요.
그건 비밀이랍니다.


9. 어떤 여선생

어쩌다 마감 시간 다 돼서 들어와서는 바 에 앉아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마감 설겆이 하느라 정신없는 노총각 쥔장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어떤 여선생.
'선생님, 마칠 시간입니다.'
'아저씨, 마감 하고 차 한 잔 하러 가실래요?'

세상에, 찻집에 앉아서 찻집 쥔더러 차 한 잔 하러 가자니.
그리고 그 시각에 어디 가서 차를 마신단 건지.
그날 그 여선생이랑 나는 찻집에를 갔을까요 술집에를 갔을까요.
아니면 안녕히 가세요 내 쫓고 문 닫았을까요.

그러게 이십년이나 지난 이야기에 참 시덥잖은 비밀도 많아요.


10. 큰 곰.

모 음대 성악과 학생.
친구 따라 어찌어찌 알고 와서는 내 찻집 단골 귀신이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음역이 드문 베이스바리톤이랍니다.

베이스바리톤을 뽑을려니 덩치는 산 만 한데 하는 짓은 꼭 개구쟁이.
간혹 마감 후에 같이 한 잔 하러 가기도 했지요.
한 잔 걸치고 어쩌다 기분 내키면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천둥산 박달재를 뽑는데
아, 여자 아니라도 뿅 가게 황홀합니다. 거짓말 안보태고 그 술집 유리창이 덜덜 떨리는데 그 날 그 술집에 있던 술꾼들 벌떡 일어서서 박수치고 앵콜 부르고 난리 났습니다.
그날 그 술꾼들 유사 이래로 성악가가 부르는 천둥산 박달재는 처음 들어 봤을테니까.
기회가 된다면 성악가가 부르는 뽕짝을 꼭 한 번 들어보시도록. 정말 근사하답니다.

지금은 내 고향 인근 어느 여고에서 훈장질 한다던데 결혼 직후에 잠시 보고 못 본지 십 여년도 훌쩍 넘어버렸네요. 그런데 명색이 성악과 출신인데 도무지 가곡이나 아리아를 부르는 꼴을 못봤습니다.
맨날 부르는 게 뽕짝이나 꺾어 제끼고. 하기사 그 친구 고돌이도 얼마나 재미있게 친다고.


11. 작은 곰

큰 곰이랑 이름이 성만 다르고 이름이 같아서 작은 곰이기도 하고
생긴 것도 좀 못생긴 오동통이라 얼추 근사치에 가까운 별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생긴 건 대충 생겼는데(진수야, 혹시 보거든 따지러 와라.) 기타 솜씨는 일품이라 아주 좋았지요. 노래도 잘 하고.

때때로 죽이 맞는 날이면 오디오 꺼버리고 나랑 둘이서 사이먼과 가펑클 흉내도 내 보고 트윈 폴리오 노래도 불러보고 재미가 좋았지요.
여러 방면으로 재주도 많고 감각이 좋아서 내 아쉬울 때면 수시로 손을 빌리기도 한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게다가 가슴팍은 여려 터져서 내가 찻집 그만 둘 무렵에 모 과의 여학생에게 꽂힌 채로 아주 가슴을 젓담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


12. 오리(도날드 박)

단골 의대생. 궁뎅이가 오리 궁둥이라고 별명이 그만 도날드가 되어버린 비운의 사나이.
내 커피가 맛있다고 장부 만들어놓고 월말 계산하던 괴짜.
언젠가 마감 후에 몇이 어울려 포장마차에서 한 잔 나누는데, 말끝에 우연히 고등학교 때 어쩌고저쩌고.....

'?....오리씨, Z고 나왔어요?'
'예.'
'몇 회 졸업생이이시세요?' (말이 좀 새기 시작하지요?)
'55회 졸업인데요.....?'
'........................................내는 46횐데...'
'........!.... 아이고 행님!!!.'

그리하여 그날 밤 무담시 떡이 되도록 퍼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시방은 울산 어디선가 산부인과 개업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13. 코끼리 커플

뚱뚱이 의대생 커플.
남녀 공히 그리 보기에 나쁘지 않을만큼 뚱보였는데 사람들이 참 어질고 겸손해서 찻집에 들어서기만 해도 아주 즐겁고 반가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커피 한 잔씩 앞에 놓고 둘이 육중한 몸을 기울여 머리 맞대고 소근대는데 그거 가만 보다가 하도 귀엽고 우스워서 코끼리 커플이라고 진짜 별명을 지었더랬습니다. 코끼리 아저씨와 고래 아가씨...
내가 찻집을 그만 둘 무렵 결혼을 했다든가 약혼을 했다든가 소문을 들은 듯한데 기억이 아심하여 확신은 못합니다.그래도 아마 틀림없이 하고야 말았을겁니다.
그렇게 닮기도 어렵지요. 남매라 우겨도 될듯 했는데 안했다면 천명을 거스르는 일이 아닐까요.



##손님 이야기를 듣고는 성질 못된 누군가는 도대체 9번 에피소드는 믿을 수가 없다며 거품을 물기도 했으며,
순전히 이미지 구축을 위한 소설이 아니냐고 눈을 부릅뜨고 기염을 토했는데,
아니, 나도 한 때는 모모한 사람들처럼 꽤나 인기도 있고 거시기 했답니다.
권불십년에 화무십일홍이라 지금이야 또 나잇값은 해야 하니 그저 그만하지요 뭘.  gg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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