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사.
그 때 내 찻집 테이블은 표면이 아주 매끄러웠습니다.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표면. 유리처럼 반들반들한 탁자에는 손만 갖다 대도 지문이 남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앉은 자리는 반드시 흔적이 남게 마련이지요. 손님이 나가고 탁자를 정리할라치면 적잖이 성가십니다. 뭔 탁자를 이따위로 장만했냔 말입니다.
.... 제작할 때 착오가 생긴 걸 사람 좋은 척, 그냥 좋은 게 좋다고 쓰기로 해놓고선 뒤늦게 타박이지요.
하여튼 흩어진 설탕이며 크림 같은 건 기본이고 담뱃재며 흘린 커피 자국에 손자국까지,
하다 못해 물걸레로 닦으면 물 자국이 그대로 남는 탓에 반드시 마른 걸레로 반들반들할 때까지 마무리를 해야 깨끗해집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이 화장기 없는 맨얼굴의 아가씨가 앉았던 자리는 도대체 사람의 흔적이 없어요.
혹시나 해서 머리를 옆으로 처박고 역광으로 살펴봐도 거울같이 반들반들 반짝반짝.
도대체 사람이 앉았는지 귀신이 앉았는지.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마시고 난 커피 잔 바닥에 옅은 갈색으로 남은 커피 한 방울. 설탕 통이며 크림 통을 열어봐도 숟가락 자국도 없어요.
갈 데 없는 천사네 뭐. 화장기 없이 수수한 얼굴이며 늘 단정한 매무새도 얼마나 예뻤는지.
아무튼 그렇게 한동안 내 찻집의 단골손님이더니 어느 날 그냥 조금씩 뜸 해지다가 회자정리,
인간사가 늘 그렇듯이 그 뒤로 종무소식이지요.
늘 목욕탕에서 갓 나온 천사 같다고 생각해서 참 보기좋았던 처자였습니다.
2. 이브 몽땅
그 사나이가 들어오면 커피 한 잔을 갖다 주고 잠시 한 숨 돌린 후에 나는 음반을 갈아 끼우지요. 말 안해도 자동입니다.
무슨 음반이냐고요?
이브 몽땅이 부른 '파리의 하늘 밑'.
간혹 다른 곡을 얹어 달라고 예의 바르게 부탁하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내 찻집에 올 때마다 그 곡은 반드시 듣고서야 일어서던 사나이지요.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크지 않은 키에 늘 모직 콤비 자켓을 입고 나타나던 그 사나이 말입니다.
언젠가 뭔 사연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과 같이 좋아했던 곡이라던데
늘 혼자 와서 조용히 앉아 담배 하나 피워 물고 이브 몽땅의 그 노래를 지그시 듣고는
나갈 때마다 좋은 음반을 갖고 계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치사를 하곤 했었습니다.
그 사나이, 내가 찻집 그만 두기 전에 서울로 발령 받아 간다고 인사하고 갔는데
아. 그 사나이,
가슴 아린 옛사랑 이제는 가슴에 묻어두고
좋은 사람 만나서 알콩달콩 따시게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가슴 아린 옛사랑은 낡은 편지처럼 가슴에 묻어 두고 그리 따시게 살고 있을 걸요.
아주 멋을 제대로 알고 있는 로맨틱한 사나이였다니까요.
3. 깐깐한 의대생
키 크고 얼굴 멀건 의대생.
혼자 와서도 꼭 6인용 커다란 원탁을 차지하고 앉아서 아주 두-꺼운 의학 원서 펴놓고 시커먼 뿔테 안경 만지작거리며 혼자 구시렁구시렁 커피 한 잔으로 두 시간 이상 때우고 나가던 커피 귀신.
커피 맛에는 아마 웬만큼 꿰고 있었던지,
혹 싸이폰에서 시간을 조금 넘겼거나 드리퍼에서 내렸다가 다시 끓인 커피는 귀신같이 알고 바꿔달라던
아, 그 지긋지긋한 배암의 혓바닥.
그래도 커피 장사 몇 년에 타성에 젖어 게을러지던 내게 경각심을 깨워주던 손님이었습니다.
지금쯤은 나이 사십 넘은 중견 의사가 돼서 어딘가에서 허연 가운 입고 그윽하게 폼 잡고 있겠지요.
여전히 까다롭기 그지없는 입맛으로 커피 즐기고 있을까 몰라.
그 까다로운 성벽으로 환자 보자면 나쁜 소리는 안들을 것 같은데.
4. 술 귀신
반드시 술에 쩔어서야 문 열고 들어서던 사나이.
뭔 아는 척을 그리도 하고 싶은지
시시콜콜 구석구석 듣도 보도 못한 얄궂은 음악들만 찾아서 수첩에 빼곡이 메모를 해 갖고 와서는 나더러 얹어달라고, 아니, 찻집에 이런 음악도 있냐 없냐 맨날 억지 부리던 사나이.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죽치고 앉아 한 곡 끝나면 또 한 곡, 끝없이 주머니에 부시럭부시럭 메모 꺼내며 듣도 보도 못한 곡명 주저리 외고 앉아서 아는 체 할려고 무진 애쓰던 사나이.
에이 참, 내 커피 한 잔 덜 팔아도 밥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겠지,
아이고 지겨워서, 넌 인제 내 집에 고만 와라 하고 내 쫓아버렸던 사나이.
귀신은 뭐 하고 있었을까 그런 인간들 좀 안 잡아가고.
5. 그 여자
학생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고
(의대, 미대, 음대만 남아있던 캠퍼스 앞이라 손님의 대부분이 학생 아니면 교수였음.)
아주 막돼먹은 느낌은 아닌데 짙은 화장으로 야릇하게 묘한 분위기의 여인네.
아주 세련된 옷차림에 유창한 서울 말로 촌놈 기죽이던 그 여인네.
언젠가 밤늦게 와서는 오늘 밤 소파에서 좀 자고 가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었는데.
어마 뜨거라,
노총각 혼자 기거하는 찻집에 그 어인 해괴한 말씀이냐고
간곡히 고사하여 겨우 돌려보내고 돌아서서는,
이런 젠장, 이십년이 다 되도록 생각 할 때마다 후회가 막심하네요. 그것 참. @@.....
6. 숙희(?) 숙현(?)
찻집에 손님도 없고 음악도 지겹고 할 때면 간혹 기타 꺼내서 혼자 노래 부르곤 했었는데
하필 그 때 들어와서 턱 괴고 앉아 내 노래 끝날 때까지 다 듣고는 아련한 눈빛으로
'노래에서 가을 냄새가 나요.'
아니, 사람 얼굴 처음 보나, 왜 남의 총각 얼굴은 빤히 쳐다보고 앉아서 일도 못하게.
뭔가 그럴싸할 가능성이 농후했건만
늘 단짝 친구랑 같이 와서 수다 떨고 나가는 바람에 고만 그러고 말았지요.
그러게 혼자 오면 어디 덧나나 몰라.
7. 꼬맹이들 떼거리
올망졸망한 음악과 여학생 다수.
장가도 못간 날더러 맨날 아저씨라며 빵이며 주전부리 잔뜩 사 들고 와서는
두 세 시간씩 떠들고는 탁자 위에 껍데기 수북하게 쌓아놓고 나가던 녀석들입니다.
수업 언제냐 나 밥 좀 먹고 오께. 아예 주방까지 맡기고 나갈 만큼 친했던 단골들이었지요.
애구. 저 철없는 것들이 언제 선생이 될라나 싶었는데 손가락 꼽아보니 아따, 그 녀석들도 지금은 마흔 언저리 넘어섰네요. 보나마나 더러더러 제법 머리 큰 아들딸도 두엇 있을테고.
아이고, 참, 세월은 잘도 갑니다. 언제 어디쯤 한 번 볼 수나 있을라는지. 세월아 네월아 그럼 나는 대체 얼마큼 늙었을까요.
# 한 이십년 전에 몇 년간 찻집을 했었습니다.
돈은 별로 못벌었었지만 참 좋았던 때라 그 때 익혔던 얼굴들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만나봐야겠다, 이런 건 아니고 한 번쯤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정도로..
아직도 생각나는 재미있는 손님들이 여럿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