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교향곡 5운명입니다.

세상에 흔해 빠진 게 베토벤의 운명입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장르를 털어서 가장 많은 녹음을 한 음반이 아닐까요.

 

어제 운명을 들었습니다.

들을려고 들은 게 아니라 4번을 듣다보니 커플링 된 5번도 따라나왔습니다.

첼리비다케 실황 녹음이었습니다. 베토벤의 4번 중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주입니다.

하지만 이 고집불통의 첼리비다케 영감님도 5번만큼은 그다지 심에 차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1악장만 듣고는 꺼버렸습니다.

 

한 때 이 곡에 미쳐서 자나 깨나 돌려댔던지라 한 가닥 한다하는 연주는 제법 들어 봤었지요.

한 세대를 풍미했던 거장들은 물론이고 근래 한 참 유행하던 원전악기 연주들에다가 새로 태어난 신생 지휘자며 굴드의 피아노 연주까지.

한동안은 닥치는 대로 구한 음반들을 수 십장 쌓아 놓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전곡 비교 감상을 한답시고 패대기를 친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고 시간 아까워라.

 

당연히 다들 한다하는 거장이며, 나 같은 얼치기보다야 적어도 십억 배 쯤은 더 음악을 사랑했을 이 위대한 할배들의 녹음이 하나인들 허투루 내 놓은 게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무식이 용맹이라고 이건 옳다 저건 그르다 더러더러 침깨나 튀기기도 했습지요.

그 와중에 별 기대9 없이 내 손에 왔다가 지나치게 사랑을 받은 나머지

그 사랑이 너무 지나쳐 그만 비명횡사하고 만 음반이 있었으니, 바로 요 아래 처참한 몰골로 깨져버린 야노스 페렌치크/헝가리 국립 관현악단의 연주입니다.

저 음반 역시도 어제 들었던 첼리비다케처럼 4,5번이 커플링이라 그만 또 가슴 아픈 사연이 생각나서 주절거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 집 큰 놈이 막 걸음마를 할 때쯤이니 아마도 1992년 겨울 쯤 되지 않았을까요.

서울 다녀오는 길에 종로 어디쯤인가에 있던 SK플라자에서 저 음반을 샀습니다. 페렌치크가 연주하는 리스트에 매료되어 있던 차라 은근히 기대를 하고 집어 들었지요.

 

집에 돌아와서 일청을 한 후, 뭐 그다지 대단한 연주는 아니라고 일단 점수를 매겼습니다.

하지만 1악장 중간쯤에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서늘한 생동감에 슬쩍 소름이 돋았던 바람에 어쩐지 자꾸 손이 갑니다. 날이 갈수록 듣고, 듣고, 또 듣고 또 듣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리 몰랐던 것이 들을 때마다 그 느낌이 새로운 것이 급기야는 그 부분이 나올때쯤이면 팔에 오싹 소름이 돋고 눈물이 핑 돌기도 했지요.

, 관현악이 다소 기복이 덜하다거나 녹음이 답답하다거나 이런 단점들은 단칼에 휙! 날아 가버리고 오로지 그 날개 달린 듯 상승, 하강하는 현 합주의 생명력에 넋을 잃었습니다. 급기야는 아예 리피트를 걸어놓고 하루 종일 이 음반만 돌려댔습니다. 아주 미쳐버린 거지요.

 

그렇게 페렌치크의 운명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어느 날

어린놈이 배고프다고 징징대길래 어디보자, 그렇다면 아빠가 우유를 타 주마, 방 한 구석에 있던 젖병을 들고 더운 물이 어디 있더라, 왔다리 갔다리 하는 차에, 한 순간 지끈!’ 별로 크지는 않으나마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린 놈이 털퍽거리며 걸음마를 하다가 막 꺼내놓은 저 음반을 작신 밟아버린 거지요. 황망간에 어린 놈을 대충 달래놓고 탈기를 하고 들여다보니 그나마 다 쪼개진 건 아니고 반을 쪼개놨는데 하필이면 4번은 멀쩡하고 그 금쪽같은 5번이 들어있는 부분만 딱 쪼개놨습니다.

44악장까지는 멀쩡하게 잘 돌아가다가 5번 들어서면 이내 틱틱틱틱 튀기 시작해서 건너뛰고 날아가고 밑도 끝도 없이 단숨에 뮤팅 걸려서 끝나버리지요. 허이구........



 

그 때만 해도 뭐 어찌어찌 다시 구할 수 있으려니 했지만 사는 곳은 깡촌이고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쉽사리 물건을 사고팔고 하던 시절도 아니다보니 이리공 저리공 세월은 가고...

그만 십 여년이 훌쩍, 어느 새 음반은 절판 돼 버리고 다시 구할 길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요.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깨진 시디조차 버리지를 못하고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그저 인연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리고는 있는데

인간이란 것이 좋았던 것은 왜 그리도 오래 기억하는 것인지. 어제도 오늘도 공연히 페렌치크의 운명 생각으로 아쉬운 마음을 들썩이다가 생각 난 김에 투덜거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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